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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06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
  2. 2017.10.05 이데올로기(ideology)아이디알러지

 

주류경제학

마르크스 & 스라파

경제문제

희소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

경제적 잉여의 재생산

경제 결정

일차적으로 개인(소비자,생산자)에 의해 결정

개인이 속한 제도와 구조 내지는 계급집단의 수준에서 결정

자본에 대한 시각

이질적인 자본재들을 생산시점 이전에 미리 주어진 합산가능한 물리적인 양(사전적 부존량)

자본을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관계

마르크스: 자본은 물리적인 존재이전에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적대적인 사회관계로 파악

문제점

자본량= 자본총가격 ×이윤율(평균적 자본소득)

 

-그러나 이윤율이 변하면 자본량도 변화한다. 그래서 주어진 자본량과 이윤율간의 고정된 함수관계를 도출할 수 없다.

스라파: 이질적인 상품(자본재)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자본재를 다른 상품의 생산에 투입되는 상품으로 간주, 즉 이질적인 상품간의 투입-산출관계에 따라 상품 및 자본재가격이 정해진다.

 

자본의 양을 가격으로 계산

이윤을 자본의 한계생산물로 설명한다. 하지만 자본을 가격단위로 합산할 때 주어진 자본량의 한계생산물로 이윤의 크기를 설명한다.

그 자본량은 또 그 이윤의 함수- 순환논법에 빠짐.

 

Posted by Jason syngeu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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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mpeter는 그의 글에서 은근히 아담스미스를 저평가 한다.

 p107, 스미스의 [국부론]은 방금 정의한 의미의 정치경제학 체계이므로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이 책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히려 스미스의 정책적 원리와 처방-자유무역과 그밖의 정책에 대한 그의 신중한 지지-이 그의 위대한 분석적 성취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갖는 미덕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그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보다 그가 어떻게 주장을 펼쳤으며, 그러기 위해서 어떤 분석도구를 사용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 자신과 그의 독자들에게는 그의 정책적 원리와 처방 자체(가치판단을 드러내는 이데올로기를 포함해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의 연구가 대중에게 널리 읽혔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인간 지성의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원리와 처방 모두 그가 살던 시대와 나라를 벗어나서는 타당성을 상실하는, 즉 그 시대와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공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어쨌든 슘페터 본인이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10대경제학자]라는 책에서도 아담스미스의 이름은 빠져 있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그의 부인과 유족들이 거의 짜집기 수준으로 책을 펴낸 것과  마르크스와 케인즈에 상당한 호의를 베푼 점도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람들의 사고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계급들의 행동과 이익을 칭송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계급에 관해 진실과 상당한 간극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그림을 그리거나 그런 의미를 함축하는 경향이 있다. 중세의 기사는 자신을 약자의 보호자이자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로서 상상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그들 세계의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 세계를 존재하도록 하는 그들의 실제행위와 여기에 덧붇일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은 다른 시대와 다른 계급의 관찰자가 볼 때 분명 매우 다르게 보인다. 이러한 사고체계를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각주:1]  당대 경제학의 상당부분은 산업과 상업 자본가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한 내용이었다. 이는 역사과정과 사회과학에 대한 우리의 시각에 훌륭히 기여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데, 그 가치는 다음의 세 가지 결점에 의해 손상될지언정,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다.

 

첫째, 마르크스는 자신이 공감하지 않는 사고체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해 매우 민감했지만, 자신의 사고체계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그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해석하는 기준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분명히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이고, 우리만이 절대적 진리의 반석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노동운동가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구의 이데올로기보다 더 나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아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은 이데올로기적 사고체계를 계급이해의 윤활유로 격하시키며, 계급이익은 오로지 경제적 의미로만 정의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다소 거칠게 말해 그가 자본가계급으로 부르는 계급의 이익-이 계급의 이익은 금전적 이득을 중심으로 한다-을 미화한다. 그러므로 실제 사업을 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국민적 특성과 성격을 미화하는 이데올로기는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항시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이긍로 환원될 수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데올로기를 해석하는 원칙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부가적이지만 훨씬 더 의심이 가는 이론을 구성한다. 여기서 원칙 자체는 오직 두 가지 의미만 지닌다. 우선 이데올로기는 상부구조로서, 객관적 사회구조의 현실(상부구조의 아래에 존재하는)을 바탕으로 하거나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이 현실을 특징적으로 왜곡된 방식으로 반영한다. 이 현실이 완벽히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로 묘사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 우리의 사고가 전적으로 우리의 계급적 지위에 기반을 둔 경제적 요소로 형성된다고 볼 수 없으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잘 정의된 계급이나 집단이익이 온전히 경제적 요소로만 형성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 마르크스와 특히 그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드러내는 언급이 사실상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난받는다고 너무도 쉽게 가정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합리적 결정처럼, 이데올로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가 포함된, 사실에 대한 주장이 필연적으로 오류가 아니라는 점도 덧붙여져야 한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싫어하는 주장들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름으로써 그 몸통을 한번에 강타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픈 강렬한 유혹을 받는다. 이 방법은 의심의 여지없이 효과적이다. 상대방의 개인적인 동기를 자극할 정도로 효과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누군가 우리에게 자신이 하는 말의 이유를 아무리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도, 그 설명 자체로는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다. [경제분석의 역사,1권,p103-104 Schumpeter.

 

과학적 경제학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역사다.(슘페터의 주장을 요약하면), p.100-116p.

슘페터는 실제로 위와 같은 주장을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학문의 편향성을 지양해야 하는 논조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물론 슘페터가 언급한 대로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잘못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라는 형식으로 주장자가 아닌 그것을 읽는 사람에 의해 잘못받아들일 가능성에 염려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잘못 읽어내지 못하도록 여러 장치를 고안해서 논리적 설득력으로 글을 써야 하는 것이 경제학자의 임무이다. "과학적"이라는 부분에 대해 그야말로 물리와 수학을 동반한 순수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슘페터 본인이 책의 앞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심리학, 사회학 등등 기타 학문과의 연계성과 포섭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예전에 본인이 논문에서 한계생산력설에 의한 분배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잘 짜여진 이론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모 논평가가 '슘페터'의 경제분석의 역사를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어봐도 나는 내가 한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완성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자본이 기여한 만큼, 노동은 노동이 기여한 만큼'-즉 한계생산성에 따른 배분-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대체탄력성이 일정하지 않다. 이 말은 그 대체탄력성이 일정한 경우 즉 선형인 경우에 한계생산성에 따른 분배가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

즉 노동과 자본의 대체탄력성은 비선형인 경우가 현실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자본과 노동간의 대체탄력성의 기울기가 일정하다면 이것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은 한계생산성에 따른 분배이론은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이 기여한 만큼, 노동이 기여한 만큼 찾아가는데도 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닌가? 또는 왜 불평등한 분배문제가 이리 심각한가를 고민해보면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그러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비딱선을 타서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슘페터 본인은 마르크스도 아니고  아담 스미스도 아닌 중립적 관찰자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의 글에서 난 재들과 달리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않고 글을 쓰고 있다고 강조하고 싶었던 마음일런지도 모르겠다.

  1. 이 말은 프랑스에 그 기원이 있다. 처음에 이말은 특히 콩디야크(Condillac) 의 이론을 참고하여 단지 사고에 대한 분석을 의미했다. 때로 이 말은 도덕철학, 즉 거칠게 말하면 사회과학과 동등한 의미로 자주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는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가 사용했다. 나폴레옹 1세도 이말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비현실적인 몽상가라고 생각한 라파예트(Lafayette)처럼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을 이데올로그(ideologues)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Posted by Jason syngeu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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